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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강, 2008/11/15 01:53, Life]
자기 고백. 혹은 자학. 내지는 근황.



나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내가 매너리즘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

매너리즘, 매너리즘... 말은 참 쉽게 하지만, 나는 이게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를 예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다.

매너리즘의 가장 무서운 부분은, 자기 자신이 매너리즘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은 절대(?) 눈치채지 못한다는 점이다.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동안... 나는 심지어 만족스러웠고 행복했다.

나는 자신감에 충만했으며,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고 있는 듯 싶었으며, 내 동료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얼마나 오만한 발상이었는지, 이 얼마나 얄팍한 식견이었는지, 이 얼마나 무관심한 태도였는지.

그리고 그 미몽에서 벗어난 지금은... 한심하게 헐벗은 내가 보인다.



나는 오만했다.

게임 개발 바닥에 들어온지 이제 60개월. 5년의 경력.

나는 이제 내가 뭘 좀 안다고 생각했다. 아니 심지어 내가 남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근거없는 자신감이 나를 휘어감싸고, 내 눈에는 오만함의 장막이 덮어씌워졌다.

그 장막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세상을 너무나도 쉽게 가늠하고, 쉽게 판단하며, 쉽게 결론을 내려 행동했다.

그러면서 나는 자신감에 충만했다.

이러한 사고의 원활한 흐름이 내 오만함을 더욱 부추기고, 장막은 점점 더 불투명해져만 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장막을 걷어내고 바라 본 세상은... 우물 안.

나는 우물 안에서조차 또 한 겹의 장막으로 나를 에워 싼 개구리일 뿐이었다.



나는 업무를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되는거지 뭐'라는 얄팍한 생각을... 대체 언제부터일까. 그렇게 일해왔다.

당연히 퍼포먼스는 절반, 혹은 이하. 그러나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만족하고 있었다. 나는 일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열의를 가지지는 않지만, 일을 싫어하지도 않는 어설픈 미적지근함이 내 원숙함의 발로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오만함의 장막 위에 얄팍한 착각의 장막을 덧대었다.

장막을 걷어내고 바라 본 업무는... 전쟁터.

치열함이 끊임없이 요구되고 있었으매, 나는 그것을 단지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그 외면을 원숙함으로 착각, 아니 오만하게 판단했다.



나는 동료에게 무관심했다.

오만함과 착각이 내 눈을 덮으며... 동료는 그저 같이 일하는 사람. 일 이외에는 소통의 창구가 없는 사람. 그냥 남. 서로 자기의 일을 하며 업무적으로만 조율을 하는 사람. 결정적으로... 그냥 놔두면 알아서 잘 일하는 사람... 으로만 생각했다.

동료라는 허울좋은 단어가 공허할만치... 그저 무관심했다.

심지어 그 동료가 없으면 내가 무너진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한 채, 내 잘난 맛에, 내 자존심에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만 있었다.

오만함으로, 착각으로 점철된 내 장벽에... 이렇게 무관심의 장벽이 더해졌다.

그리하여 내 무관심 속에서 한 명의 동료는 눈에 보이게 무너져 갔으며, 또 한 명은 내 눈 밖에서 보이지 않게 무너져 갔다.

아니 그 무너짐에 내가 책임을 느낀다는 얄팍한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무관심했다. 이것이 내가 짊어진 죄이다.

그리고 결국 내 매너리즘의 장벽을 깨어 준 것은 바로 그 동료였다.



그렇게 내 오만함과 착각과 무관심의 매너리즘이 깨어진 지금...

그러나 자기 자신이 매너리즘에 침잠해 있었음을 깨닫는 것과, 이를 극복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라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나는 조금 더 겸손하게... 아니, 보다 조심스러워지려 노력하고 있다.

나는 조금 더 옛날의 열정으로... 아니, 업무의 치열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 게으름을 걷어내려 노력하고 있다.

나는 조금 더 사람에게 살갑게... 아니, 동료에게 내가 기울여야 하는 관심이 무엇인지를 배워가고 있다.



나는 매너리즘을 극복했다... 라고 선언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아마도 나의 이러한 노력들은 새로운, 하지만 조금은 더 넓은 우물 속으로의 침잠을 부여할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다음 번 또 다시 우물 밖으로 뛰쳐나와야 하는 때가... 조금은 더 빨리 와주길 기대할 뿐.

그리고 그 때엔 그 탈출이 조금 덜 아프길 기대할 뿐이다.



그렇게 요즘은... 열심히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고 있다.

아니, 소를 잃고서 이제야 겨우 새로이 외양간을 짓고 있다.

이제사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훗날 어느 소를 위해서든 내 안에 외양간 한 채는 제대로 지어놓겠다는 생각으로, 최대한 열심히 지어보려 하고 있다.


심지어 그 노력이 더욱 즐겁다는 새로운 경험이 반갑기까지 하다.



하지만 역시 어쩔 수 없는 것은...

나는 내 삶에서 한 조각의 미소와 한 방울의 눈물을 영원히 잃어버린 듯 싶다.

그것이 내가 이 우물을 벗어나려 바둥거리며 지불하는 대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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겜퍼군 | 2008/11/16 17:55 | PERMALINK | EDIT/DEL | REPLY
좋은 글 잘봤습니다. 음 전 제 실력부족에 대해 늘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게임만드는건 정말 힘든일 같아요. 솔직히 초보수준의 제가 뭐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ㅜㅜ
글강 | 2008/11/16 23:31 | PERMALINK | EDIT/DEL
뭐 저도 초보나 마찬가지죠 -ㅁ-; 업계 선배님들 보시기엔 풋사과의 고민 즈음일 듯 ;;;
그리고 사실 이건 게임업계 아니더라도 사회 생활 그 자체에서 오는 고민일 것 같기도 합니다 ㅎㅎㅎ
댕디기댕 | 2008/11/17 11:37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전 지금 기획자 혼자라서...
못하는 부분(자신없는 부분이 아님)을 기획하게 될 때마다.
아주 확 그냥 죽어버리면 마음 편할 것 같은 나날의 연속이어요...orz
'뭐 만들까?'로 세월이 흐르다보니, 실무 감각도 싹 다 날아가고 없어져서, 이건 뭐 신입 수준..ㅠㅠ
거의 매일 '쉬바, X라 만들 때는 일 잘하는 사람들 사이에 껴있었는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지요 ㅠㅠ
글강 | 2008/11/17 12:01 | PERMALINK | EDIT/DEL
1. 못하는 부분을 기획할 때마다, 처음 보는 게임을 막 구입해서 포장 뜯는 기분으로 접근하면 도키도키 재미있다능.
2. 실무 감각은 다시 실무하면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 안심.
3.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 ( '')
BomB | 2008/11/23 11:29 | PERMALINK | EDIT/DEL | REPLY
오랜만에 들어와봤는데, 멋진 블로깅이신거 같습니다..

저도 그러고보니, 병장 들어설 때 즈음 해서 매너리즘에 빠져버린것 같군요...

업무야 특별한 지시 없이는 방치하고, 대충 할것만 하면 되고, 선임병들은 만만하고 후임병들은 그냥 거의 방치하는 수준입니다.

제가 이등병때 그런 모습을 봤다고 그대로 따라한 타성 자체가 잘못이라고 깨닫기 까지는 너무 많은 날이 걸렸죠.

100일 남짓 남았을때 정말 심각성을 깨닫고 타파하기 위해 노력해봤지만... 역시 한번 굳어진 이미지랄까.

그런걸 깨기는 굉장히 힘든것 같습니다. 신병들이나 잘해주면 잘해주는 노력을 알기나 할까...
글강 | 2008/11/23 13:20 | PERMALINK | EDIT/DEL
하악 물론 저도 군대 있을 때엔 그런 타성에 젖어있었죠 -ㅁ-; 제대한지 오래되다 보니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쳐본 적 없군요 ㅎㅎㅎ
뭐 문제는 다분히 개인적인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병한테 잘해준다고 신병이 그걸 알아주길 바라고자 하는게 아닌거겠죠. 결국은 자기 채찍질의 의미라고 생각하신다면 깨기도 그만큼 쉬울 수(?) 있겠죠.
| 2008/11/25 00:37 | PERMALINK | EDIT/DEL | REPLY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글강 | 2008/11/25 15:34 | PERMALINK | EDIT/DEL
괜찮습니다 :)
productionkim | 2008/11/25 02:29 | PERMALINK | EDIT/DEL | REPLY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마치....득도하신 것 같네요 ㅎ__ㅎ
생각이 변하시지만 않으신다면...앞으로는 좋은일들이 많이 일어 나겠군요 ~~호홋~
글강 | 2008/11/25 15:34 | PERMALINK | EDIT/DEL
쿨럭 ;
득도는 커녕 사실 요즘 아노미 개찌질 상태입니다 ㅎㅎㅎ
(par)Terre | 2008/11/27 15:00 | PERMALINK | EDIT/DEL | REPLY
사실.. 매너리즘의 가장 큰 적은 "내 자신" 보다는 "적은 투자, 높은 수익"을 기대하시는 분들 때문일지도...
+1. 이래저래 올해는 많이 힘드네요. - -.
글강 | 2008/11/27 16:00 | PERMALINK | EDIT/DEL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 잘 지내셨나요 :)
천만 다행스럽게도 요즘 몸담고 있는 팀은 "적은 투자, 높은 수익"의 압박이 덜해서 일하기는 참 편합니다. 으으 너무 편해서 오히려 "내 자신"이 적이 된 것 같기도 하고요 ㄱ-
+1. 남은 한 달 잘 보내시고 내년에도 잘 생존해야죠 ㅎㅎㅎ
Master_G | 2008/12/01 11:22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안녕하세요. 가끔 글강님 블로그에 들렸는데 첫 리플을 다는 것 같네요. 플래폼은 다르지만 저도 게임기획을 맡고 있는 지라 글강님의 블로그를 보면서 공감하는 부분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전 절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리라 항상 다짐을 하고는 있는데 제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제 곁에 성큼 다가와 있을지도 모르죠.
혹시 합의와 타협도 매너리즘에 포함 되는건 아니죠?
글강 | 2008/12/01 12:51 | PERMALINK | EDIT/DEL
안녕하세요 :)

뭐 본문을 거창하게 적어놓기는 했지만 -.- 사실 다분히 사춘기스러운 자기 고민인지라 어떻게 답변을 드려야 할는지 좀 망설여 집니다 ;;;

제가 이번에 나름 깨달은(?) 부분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라는 것인데요. 그런 의미에서라면 자기와의 합의, 타협 즉 자기 합리화는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기도 한 반면 동시에 양날의 검과도 같이 위험하지 않나 싶습니다.

혹여 말씀하신 합의와 타협이 타인과의 그것을 의미하신다면야... 그건 기획자의 스킬이죠ㅋ 물론 그 합의와 타협이 이루어진 지점에 대하여 자기 자신이 어떻게 자기 합리화를 하느냐의 부분은 계속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Master_G | 2008/12/02 11:57 | PERMALINK | EDIT/DEL | REPLY
글강님! 좋은 조언 감사 드립니다. 역시 공감대가 많이 가는군요.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합의와 타협은 타인과의 그것을 말하는 것 이었습니다.
항상 그 스킬을 올리기 위해서 많은 배움과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글강 | 2008/12/02 13:53 | PERMALINK | EDIT/DEL
네 기획자의 필수 스킬이겠죠.
다행히 듣는 자세, 논리적 사고, 의사 진행, 화술 등은 모두 훈련을 통해 향상할 수 있는 것들이니까, 노력하시는만큼 많은 발전이 있을거라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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